글: 우주의메신저

오랜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막 한국에 귀국했을 무렵의 일이다. 낯선 환경에서 집에만 머물기 답답했던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동네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넓은 공원 그 어디에서도 아이들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에 있을 때만 해도 방과 후 공원은 늘 뛰노는 아이들로 북적였는데, 한국의 아이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일본에서 시우는 현지인들이 다니는 구립 초등학교에 다녔다. 수업이 끝나면 해가 질 때까지 공원에서 친구들과 한바탕 땀을 흘리며 노는 것이 당연한 일과였다. 그 후 집 근처 주산 학원에 잠시 다녀오는 것이 아이가 받는 사교육의 전부였다.

시우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집에서는 늘 가족들과 한국어로 대화를 나눈 덕에 말귀를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서 보니 한글을 전혀 쓸 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한국어보다는 일본어가 훨씬 익숙했던 아이는 한동안 낯선 환경 속에서도 일본어로 재잘거리곤 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외할머니의 권유로, 한국 학교로 전학하기 전 근처 보습학원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같은 건물에 있던 태권도장도 함께 등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공원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동네 친구들을, 왜 한 명도 볼 수 없었는지 말이다. 아이들은 공원이 아닌 학원에 모여 있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세 번이고 이사를 감행했던 맹모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까? 내 아이에게만큼은 지식 너머의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진짜 스승을 인연 맺어주고 싶었다. 기회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학교 방과 후 영어 수업 공지문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부담 없는 비용에 이끌려 덜컥 전 요일을 신청해 버렸다.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엄마 마음대로 신청하는데!”

의사도 묻지 않는 일방적인 결정이라며 날을 세우던 사춘기 아이. 하지만 툴툴거리며 문을 나섰던 아이는 단 한 번의 수업만으로 선생님이 마음에 들었는지 진득하게 수업에 참가했다. 아이가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내심 뿌듯해하던 무렵, 잔잔하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귀국 후 줄곧 다녔던 보습학원의 스케줄이 하필 방과 후 영어 수업 시간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학원 측의 태도는 완고했다. 방과 후 수업 따위는 사교육의 정밀한 시스템을 따라올 수 없다며, 자신들의 커리큘럼에만 온전히 집중하라는 압박이었다. 밀려드는 가게 일로 가뜩이나 정신이 없던 나는, 결국 전문가라는 학원 원장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방과 후 영어 수업을 취소해 버렸다. 그것이 내 아이의 마음에 얼마나 깊은 낙인이 될지는 미처 알지 못한 채.

하지만 시우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마음을 붙였던 영어 선생님과의 이별은 아이에게 보이지 않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긴 듯했다.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각, 모두가 잠든 적막을 깨고 시우의 방 안에서 누군가와 은밀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문 앞에 서서 귀를 가져다 대고 시우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문틈으로 흘러나온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방과 후 영어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흐느끼는 시우를 다정하게 달래며, 학원에 가더라도 언제든 마음의 고향처럼 찾아오라며 아이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특히, 그동안 시우가 힘들게 다듬어온 영어 발음과 언어적 감각이 획일적인 학원 시스템 속에서 망가질까 진심으로 염려하는 선생님의 나지막한 음성이 내 귀청을 때렸다.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충격이 일었다. 이분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해 단상에 서는 일반적인 강사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는 참 스승이었다. 나는 묘한 확신에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가 시우의 전화를 건네받았다. “선생님, 저 시우 엄마입니다.” 그렇게, 깊은 밤 11시의 적막 속에서 예기치 못한 운명적인 학부모 상담이 시작되었다.

알고 보니 방과 후 영어 선생님은 평범한 강사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대학에서 영어 음성학과 발음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현직 교수였다. 어떤 남다른 사연이 있어 초등학교 방과 후 교단을 지키고 계신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이미 꽤 오랜 기간을 이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의 언어적 토양을 일구어 오신 분이셨다.

“이 나이 때 발음을 교정하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는 결코 원어민의 소리를 낼 수 없어요.” 그 완강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듣는 순간, 비로소 눈이 번쩍 뜨였다. 시우가 어째서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원어민에 가까운 유려한 발음을 구사할 수 있었는지, 그 기적 같은 비밀이 비로소 풀리는 순간이었다. 타국 생활을 오래 하며 언어에서 발음이 가진 절대적인 무게를 뼈저리게 체감해 왔던 나였다. 이 선생님은 진심이라고 느꼈고 학원 시간을 조절해서 방과 후 영어 수업을 계속하기로 했다.

다음 날, 나는 보습학원 선생님을 찾아가 전날 밤의 결정을 전했다. 하지만 학원 측의 견해는 방과 후 교수님과 완전히 달랐다. 학원 선생님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만류했다.

“어머니, 지금부터 중학교 내신 시험에 대비하지 않으면 금방 뒤처져요. 발음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은 무조건 진도를 빨리 빼야 하는 시기입니다.”

중학교 성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학원의 태도는 내가 원하던 교육 방향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보다 아이의 정서가 안정되고 그 나이에 맞는 행복을 누리는 게 훨씬 중요했다. 결국 학원 측과 무리하게 시간을 조율하기보다 학원을 그만두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영어를 계속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방과 후 수학 선생님도 아이들을 아주 잘 가르쳐 주십니다”

내 결정을 들은 영어 선생님은 좋은 수학 선생님을 추천해 주셨고, 덕분에 수학까지 방과 후 수업으로 자연스럽게 대체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아이의 공부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편이었다. 혼자서 커피점을 꾸려나가며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 스스로가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억지로 주입하는 공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나름의 교육관도 있었다.

그러던 중, 중학교 입학 원서를 제출할 무렵이 되었을 때였다. 거실에 있던 시우가 갑자기 내 앞으로 걸어와 선언하듯 말했다.

“엄마, 나 이제 공부할래요.”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찰나의 침묵 속에서 왈칵 미안함이 밀려왔다. 생업을 핑계로 아이에게 제대로 된 관심 한 번 주지 못한 채, 그저 친정어머니에게 시우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겨두었던 내 방관이 거울처럼 눈앞에 비쳤기 때문이다.

시우의 중학교 지원 문제는 아이 인생에서 스스로 내린 첫 번째 선택이었다. 화두를 던진 것은 방과 후 영어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시우가 집 앞의 중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셨다.

사실 우리 집에서 불과 100미터 거리에 중학교가 하나 있었다. ‘학교와 직장은 무조건 가까워야 한다.’는 주의였던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이 반대하신 이유는 바로 면학 분위기 때문이었다. 대학교수이기도 한 방과 후 수업의 영어 선생님은 낮 시간에 그 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수업 도중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하셨다고 했다. 아이의 정서가 물들까 염려하신 것이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시우는 다시 수화기를 붙잡고 선생님과 진학 문제를 상의하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에는 아이의 장래를 향한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요즘 같은 세상에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조차 이토록 깊이 고민해 주지 않는데, 방과 후 선생님은 마치 제 자식의 일처럼 온 마음을 다해 시우를 이끌어주고 계셨다.

결국 시우는 영어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중학교로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록 같은 구 안에 있는 학교라 해도 집에서 꽤 떨어져 있어 매일 버스를 타고 통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는 정말 공부를 해보겠다며 눈빛을 반짝이는 아이를 보며, 나는 시우의 선택을 온전히 믿고 맡기기로 했다.

문제는 이미 학교에 제출해 버린 입학 원서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교육청에 전화를 걸어 문의하니, 다행히 신청 마감 기한이 바로 당일 까지라며 서둘러 담임선생님께 확인해 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곧장 담임선생님께 연락해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다행히 원서를 아직 교육청으로 넘기지 않고 가지고 계신다며 흔쾌히 돌려주셨다.

나는 원서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 시우의 의사를 다시 한번 진중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시우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원서를 수정하여 제출하도록 했다. 아이는 스스로의 의지로 진로를 바꿨고, 마침내 원하는 중학교로의 입학이 최종 결정되었다.

그렇게 중학교 입학 문제는 무사히 해결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새로운 난관이 찾아왔다. 바로 영어였다. 중학생이 되면서 더 이상 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교수님께 영어를 배울 수 없게 된 것이다. 별도의 사교육 없이도 시우의 발음을 원어민 수준으로 끌어올려 준 분이었기에, 나는 은근히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지도를 계속 받을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영어 선생님은 단호하셨다.

“이제 아이에게 맞는 마땅한 다른 선생님을 찾아보셔야 합니다.”

내게 커다란 숙제가 하나 남겨진 셈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우선 원어민 선생님을 구해 공부를 시켜보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시우는 원어민과의 수업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겉돌기만 했다.

마침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어느 영어 학원 원장님을 알게 되었다. 연세가 일흔을 훌쩍 넘으신 분이었는데, 평생을 영어 교육 한길에만 매진해 온 숨은 거장이었다. 참 신기하게도, 원어민 수업에는 좀처럼 마음을 붙이지 못하던 시우가 이 원장님만큼은 유독 잘 따르며 한 해 동안 정말 열심히 배웠다.

시우는 어려운 문장도 그 자리에서 척척 외워냈고, 앞서 다져진 유려한 발음까지 더해지니 원장님 역시 아이의 남다른 언어적 재능을 알아보고 교육열을 불태우셨다. 나는 시우가 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지식뿐만 아니라 인성이 바른 아이로 성장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시우에게 평생의 자양이 될 훌륭한 스승을 인연 맺어준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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